case 01: 교집합

 

 

🔘압착기와 인쇄기가 어떻게 다른가 하면
하나는 감성을 만들고, 하나는 이성을 만들지.
하나는 심장을 뛰게 하고, 하나는 세상을 뛰게 하지.
-뮤지컬 [구텐버그] 발췌 

 
 
 
 
아주 어릴 때엔 내게 부친이 둘에 모친이 둘인줄 알았다,
주말만 되면 한 집에 여섯이 모여 있었고, 그만큼이나 오래된 인연이어서.
그래서 이 친구는 누구냐고, 아빠가 숨겨둔 내 동생이냐고 대뜸 물었을 때에 어른들이 식탁을 치며 웃은 기억이 난다.

어느 한 쪽을 동생이라 불러야 하나 고민했을 때엔 감씨 아저씨 쪽에서 '너흰 오늘부터 친구야'라며 손을 맞잡게 하셨던가. 나와 눈높이를 맞추며 지긋이 바라보고, 이윽고는 크고 텁텁한 손으로 내 머리를 꾸욱 눌러오셨던 그 모습이 여전히 시야에 선하다.

넉사레있고 다정한 감씨 아저씨. 언젠가는 '다영'이라 소개했을 인물, 감규상에의 첫인상이다.
 
 
"아, 오빠네도 참 지독하다. 지아까지 오빠마냥 키움 어떡해요? 애가 이 아침부터 가게에서 주머니에 사탕 슬쩍하던 애 잡고 혼내고 있었어."
"그거 우리 큰누나도 말하더라, 우리 애가 뭐 어때서? 좋은 일 했구만."
"아니, 우리 성욱이가 좀 자식한테도 정의심 되물림을 할 수도 있지? 너무 딱딱히 그러지 말자 누나."
"야이 감규상아, 물려준 적 없다니까?? 지아야 감씨 아저씨 좀 때려줘라 아빠 억울해 못 살겠다."


일찍부터 일어나 집 밖을 걷고 돌아오는 길에 감씨 아저씨네와 마주쳐 손 잡고 집에 갈때마다 이런 농담을 주고받으셨던 것을 기억한다.
가영씨(가명, 본명 한성욱.)는 매번 억울하다 그랬지, 그 과장스런 모습에 나도 감씨아저씨도 웃음이 터졌었다. 옆에서 웃진 않고 혀를 차거나 관심 없어 보이는 세 사람을 같이 보니 참 썰렁한 광경이었는데. 그러나 결국엔 어른들은 넷이서 잘도 모였고, 저들의 이야기를 나누며 이윽고는 쉽게 웃음짓고 화목해졌지.

듣자 하니 어른들끼리는 대학 시절부터의 지인이랜다.
눈을 뜨고 귀를 열어 입으로 소리를 뱉은 지식인이 탄압받던 시기, 이 나라가 크고 작게 혼란했던 불합리한 시기를 정면으로 부닥치며, 그럼에도 각자의 신념대로 물러서지 않은 사람들끼리 지금까지도 마주보고 있다 그랬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친했다는 것이 지금도 엄청나게 실감이 되고 그렇진 않지만 여전히도 그 우애는 참 가치있다 생각하고, 나에게도 있었음 하는 것이다.
힘들 때엔 서로 상담할 수 있고, 기대 설 수 있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친밀하고 든든한 동료지간. 


"애들끼리도 친해질까요?"
"친해질 수 있겠지, 지아가 있는데."
"귤이가 좀 내성적이라 걱정됐는데 지아는 잘 해주겠다, 언니네한테 이렇게 또 신세를 진다."


그런 사람들이니 저들의 자식들에게도 그 연을 이어가게 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반가워!! 이름이 뭐야? 나이는? 어디 학교 다녀? 아, 내 동년배랬으니까 아직 학교 안 다니지?"
"......"
"그럼 내 소개를 먼저 할게! 엇흠. 우리 동네를 지키는 골목대장, 조만간 일등성이 되고 싶은! 한 지아라고 합니다!"
"...너 일등성이 뭔진 알아?"
"밝은거!!!"
"냅둬라 귤아, 지아는 장래희망이 소방차라고 해도 그러려니 하는 애란다."
 

당시의 귤은 몹시 어렸으나 지금과 같이 비교적 내성적이고 배타적이었고, 반대로 당시의 나는 지금과 같이 외향적이고 타인과 잘 스며드는 편이었다.
나는 포기하지 않는 편이었고, 당시의 우리에겐 허락된 시간과 나날이 꽤 길었다. 

나이를 먹고,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고, 중등 교육을 위해 각자의 길로 흩어지고서도. 이런 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이 6인 집합 체제는 몹시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이라 깨지리라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오늘 조금 서운했어도 내일 해소하고 다시 손을 맞잡고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관계.
나는 친구가 더 많으면 그만큼 좋았고 귤은 교류하는 친구가 그닥 없었다, 기꺼이 하교 후 혹은 휴일 등에 귤네 집에 찾아가서 이래저래 유인물을 보여주거나 오락을 즐기거나 했다,
내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이었다.

길게 허락된 시간과 나날은 이윽고는 서로를 선에 들여 교집합에 넣었지, 기쁘게도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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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이런거 좋아했지?"


꽤 고딕한 도트풍 호러게임 광고를 뉴스 보다 찾아서 그대로 보내준 적이 있다. 귤이는 어릴때부터 저런걸 꽤 좋아했던 걸로 기억한다, 아주 공공연한 취향이진 않아서 방에서 몰래 하나씩 쥐여주는 정도였지만.


"영상 봤는데, 흑백이긴 한데 고어 묘사가 조금 노골적이더라고? 우아... 난 쫌 무섭더라."
"지금 얼리어뎁터네, 다음달 발매야."
"아, 아직 발매 안 된거야? 아~ 그까진 못 봤다 내가."
"아냐, 즐겨찾기 넣어두고 나오면 살게. 고마워."


이따 편의점 가서 크림빵 사줄게, 바나나 우유도. 대꾸하며 머리를 쓰담는다, 그 손길이 괜히 좋아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게임에 대해 그만큼 매니악히 알지는 못했으니 그냥, '네가 잘 하겠지'정도로 넘겼던 것 같다. 청소년 폭력성의 원인이 폭력적인 게임이라 하는 시대는 아무래도 지나갔으니까. 액정 너머로 조금 무서운 짓을 한대서 그걸 밖으로 표출하진 않을 것 아닌가.
그렇게 믿으니까, 그래서 단순 취향 선으로 보고 이해하기로 하였다. 감씨 아저씨네에서도 '잘 좀 부탁해'라 하셨고.


"넌 아예 방송으로 진로 잡으려고?"
"그럴까 싶어, 다들 반대 안 하고. 너는 드디어 탐정이야? 오늘도 동네 순찰 돌더니."
"아, 한국에도 이제 탐정학과가 생긴다 하잖아. 아~ 경찰로 해야 하나 해외로 나가야 하나 고민했는데! 드디어 영어 공부 안 해도 된다."
"탐정학과도 성적 맞춰야지."
"에이, 회화용 영어랑 성적용 영어는 다르지~"


그래, 그게 너한테 맞아. 누가봐도 너는 탐정감이야.
조용히 그리 두둔해주었다.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니 분명 칭찬이지, 같이 보내온 시간과 나날이 그 마음을 알려주지 않았나.
 
 
나는 당시에도 여전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산책로를 포함해 동네를 가볍게 돌아보고, 이웃분들과 만나면 인사하고 안부를 묻고. 해가 뜨고 어느 정도 날씨가 보일 즈음에 돌아와 가족들에게 날씨를 보고하고 씻고 등교 준비를 한다.
지금이야 좀비... 감염자 탐색으로 기능하는 패트롤은 본래 이런 역할이었지, 다들 잊었으리라 여겨지지만. 평화로운 세상이었으니까 이런 가벼운 역할만이 쥐여져 있었어.
 
부모가 전직 사회운동가였고, 어쩌면 나 역시 그 영향을 받았을지 모르겠다. 어쨌건 나는 어릴때부터 굳건히 이런 생활을 해 왔고, 호기심을 기반으로 한 특유의 정의심 역시 떡잎부터 되바라졌다.
그런 나였으니, 수사 드라마 같은걸 보며 탐정 같은 이색직업을 하고 싶어한건 어쩌면 당연했다. 좋게 말하자면 진로가 독특했고 나쁘게 말하자면 무슨 만화같은 소릴 하냐 싶은 비현실적인 소망.
그랬던 것이 요 최근 탐정학과라는 게 실제로 생겼다 하니 안 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보통은 경찰이나 보험 쪽 수사관이 된다지만. 사립 탐정의 길 역시 열려 있다 하고. 일등성 지망자로썬 바라마지 않는 길이지 않던가! 탐정은, 그 동네를 지킬 수 있는 존재라고 난 믿는다.
 
침대에 드러누워 천장을 올려다 본다. 우리들은 귤이에게 모든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학생 수준에 걸맞는 가장 좋은 침구와 벽지로 이뤄진 사각형 공간에서 가만히 숨을 쉰다. 천장 구석까지 말끔히 마감된 벽지 끝과 차광 커튼으로 멀거니 시선을 둔다.
 
 
"예상은 했지만 진로는 완전 갈리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중학생이 되어 나는 학교에 다니게 되어 상대와 거의 상시 공유되던 타임라인이 약간 분리되었다.
진로를 따라가다 언젠가는 더 멀리 떨어지게 될 수도 있단 우려는 진작 들고 있긴 하였다, 당연한 일상은 영원하지 않을 수 있다고.
 
 
"이렇게 되면 우리 어른 돼서는 일하다간 못 보는거 아냐?"
"새삼, 내가 너 따라 갈순 없잖아. 너도 네 입으로 탐정 말고는 싫다며."
"그건~ 맞아. 뭐 우리 부모님들도 다들 직업 다른데도 친하시니까! 우리도 그럴 수 있겠지."
"그래, 힘내봐 명탐정."
 

각자의 진로에 따라 진학했더니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어른들은 참 좋아했고, 나는 운명이라 그러며 웃기는 소리를 했지. 당연한 일상이 몇 년 더 연장되었으니까.
우린 서로를 믿잖아, 절대 엇나가지 않은 채 이 당연한, 오늘도 내일도 찾아오리라는 일상에 잔존해 있을 것임을 믿으니까. 그러니 순순히 기뻐할 수 있는 거지. 멀거니 올려다보던 천장에서 시야가 상대에게로 옮겨지고, 이윽고 편하게도 만연히 웃으니 눈웃음이 마주된다.
이런, 참 안정된 교집합 속에서 거의 일생을 보내온 인연이란 얼마나 소중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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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벅, 저벅. 자갈 밟는 소리가 가까워온다.
귀 끝이 부은 듯이 아프다, 귀를 손으로 쥐어 좀 녹이려 고개를 드니 눈이 부시다. 동이 트며 지평선 위가 하얗게 새어 땅에 퇴양볕을 쬐고 있었다.
 
아, 벌써 이런 시간이구나. 돌아갈 때가 되었네. 다가오는 발소리의 진원지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왔어? 나도 슬슬 돌아가려고 했는데."
 
 
혈향이 짙은 벌목용 도끼를, 날이 바깥쪽으로 가게 쥔 채로 상대가 돌아온다. 거긴 뭐 있었어? 물어보니, 상대는 그저 다른 쪽 손으로 들고 있던 종이파일을 슬 들어 보일 뿐이다.
 
 
"적어 놨어."
 
 
굳이 내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기록했는지 네가 직접 가서 볼 필요는 없어, 하는 말까진 나오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법한 이야기이며, 상대가 내게 항상 요구하는 것이라.
이에 대해 깊게 캐묻거나 불만을 표하지 않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 그런다.
 
 
호러 게임을 선호하는 정도는 충분히 상정 내이다.
그 정도가 강해 고어 부류를 즐긴다 하는 것 역시 일상적인 호불호 선이라 생각한다, 게임과 현실을 분별하지 못하는 미숙한 어른이 아니니까.
그러나 그 이색취향이 보통 윤리의 둘레를 아득히 넘어서, 현실의 육신이나 혈향 그리고 시신에까지 이어지는 모종의 시그니처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재까지도 고민은 깊으나 당장 우리의 대답은 같았다, 여지껏의 당연한 일상을 영위해온 우리들은 이 문제를 덮어두기로 했다.
 
 
"...정말 이게 네가 바라는 정보가 맞아?"
"...응, 그 너머에 모두를 위한 길이 있을 테니까."
 
 
현재의 우리들은 정보가 모자랐다, 감귤은 시신으로부터 그 정보를 취득할 수 있고, 나는 그 정보를 바탕으로 다음 목표를 수정한다.
상대만큼 비위가 강하지만은 않은 나의 일을 상대가 대신하고, 그로써 우리는 서로를 구할 수 있다.
결코 그 누구도 나쁜 마음 혹은 숨기려는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지 않음을, 여지껏의 일상으로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까. 이 마음을 배신할 순 없다고 서로에게 말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구태여 이 시그니처를 자극하지 않는다.
 
그래, 재난 상황에서야 쓸모가 있는 탐정에, 사람이 죽을 때에 가장 빛을 발하는 시그니처의 조합. 바라마지않던 교집합이 이로써 한 둘레 더 생겼구나.
어찌 이를 기뻐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그를 돌아볼 시간조차 주지 않는 것이 가장 잔혹했다. 재난은 우리에게서 인간적인 자질을 분명 앗아가려 하고 있다. 몸은 무사할 지언정 마음은 그러하지 않을 것이다.
 
 
"파일은 이따 확인할게, 오늘도 고생했어."
 
 
혈향 짙은 상대를 토닥여주고, 상대의 손이 다 찼으니 상대의 품에 팔을 비집어 넣곤 그대로 팔을 끌어 안아 간다. 갑작스레 팔짱이 끼워졌는데도 저항이나 불만은 보이지 않는다. 이로써 우리는 서로를 존중할 수 있다.
참으로 당연했던 우리의 일상은, 그리고 우리의 교집합은.
현재엔 이런 방향으로 용케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 돌아가자."
 
 
귤이 돌아온 너머로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려 할 때에 고개가 잡혀 다시 앞으로 내밀어진다. 이 행동으로부터 야기된 미묘한 거부감을, 당시에는 그저 스쳐 지나갔던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