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졸업 후.
2024. 5. 14. 13:50

 

 

 

 

 


 어디서 그런 말을 하더라,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과학적으로도 혈액은 물보다 밀도가 높으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 격언을 조금 더 다각도로 관찰할 필요가 있다. 그저 혈연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의 재산과 학벌, 신앙, 선택마저도 휘두를 수 있는 법적 권리를 갖는 타인을 상대로 남이라 호칭하는 것이 왜 이리 어려울까.


...라던가, 운운. 시대도 변했으니 이젠 말이 다르다. 혈연 그게 뭐라고, 그걸 끊어내는 것은 요즘 와서는 그리 어려운 일도, 특이한 일도 아니다. 더불어 서로의 사상이 맞지 않는다면 더욱 그러할 테니... 지금과 같은 태동의 시기엔 어딘가의 변호사는 매일같이 밀려오는 절연 관련한 의뢰로 엄청나게 벌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지.


다만 그에겐 이 과정이 그저 집을 나와, 편지를 비롯한 연락을 끊고 그들이 전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잠적하면 끝날 일은 아니었다. 변호사를 선임하여 법으로 해결 볼 수 있는 사안도 아니었다.
그러기엔 제 양친의 재산과 인맥이 너무 귀했고, 그들 손에 넘어가는 것은 더 꼬왔고... 여지껏의 제 그럭저럭 완벽했을 성과가 아쉬웠다. (완벽과 그럭저럭이 같이 쓸 수 있는 단어던가? 그의 사전에선 그랬다. 애시당초 그의 '완벽'은 perfect라기보단 very good result에 가까웠다.) 그리고 더불어 어지간한 변호사도 그들을 앞에 세워서 맥을 추릴 수 있을거란 장담도 되지 않았고, 일을 쓸데없이 키웠다간 또 저들이 돌아가는 길에 약에 뭐를 섞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사고의 범인은 그들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보다도 사고의 범인이라는 단어부터가 이상하지 않은가...)


아무튼 이건 오로지 나의 문제였고, 나 혼자서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야 하는 문제이다. 

타인의 가장 좋은 것을 탐하는 사람 덩치의 쥐새끼들, 단 일 초라도 그들 곁에 함께하고 싶지 않은 지저분한 존재.

일전의 내 보가트는 과연 그들과 그들에게서 학습한 나를 비유한 것이다, 나는 보자마자 알았다.

 

 


 

"음...하지만, 네 자체를 생각하면 세뇌당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을지도?

세상에 틀어박혀도 아닌 건 아닌 것 같다를 깨달을 수 있다는 거지."

 

 


 

 

 

알고 있기에 더더욱 구역감이 쏠렸고. 이제 고평가도 받은 김에 더는 일 초라도 그들과 동화되고 싶지 않았다.

졸업 직후에 곧장 날을 잡아 본가 저택까지 발걸음을 옮기는 사유로썬 충분했다.

 

 

 

 


 




"그래서..."
"예."


양친은 현명한 사람이었다, 혹은 그들에게 모종의 기대를 하지 않는데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덕분에 나는 일평생 나의 집이 아닌 본가에 내 발로 향한 적이 드물었다. '우리는 당연히 여기 있어야 할 사람이다'하는 양 런던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대저택을 보곤 기가 차서 웃음이 다 나왔지.
뭐, 당신들이 뭔가 특정한 사업을 대대손손 이어온 것도 아니고. 마법부 직속인 곳도 아니고, 어디 왕정 관련한 사람들인 것도 아닌 어마어마한 부자일 뿐이면서 뭘 노리는 거람...
원래도 런던의 거리를 내다볼 때엔 그 창문이며 건축 양식이 모조리 나를 쳐다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져 거북했다, 그 감각이 여기 와서는 노골적일 정도라 내가 조금만 더 어렸다면 식은땀이 다 났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 본가 저택 응접실에서, 슈Choux의 큰 어르신, 그리고 나와 나이가 비슷한 다른 슈의 이름을 물려받은 젊은이 한 명 더해 둘이서 나를 응대하고 있었다. (앉아 있긴 했지만, 어르신 허락 없인 말을 꺼내기 어려워하는 입지인지 나에게 한 마디도 말을 걸어 오는 일은 없었다.)



"이게 네가 낸 결론이라고?"


큰 어르신은 깊게 침참된 숨을 뱉는다, 크게 [R]이라 적힌 흑적 색 실링 왁스가 찍힌 편지의 내용물을 까 보곤 그들 사이의 테이블에 툭 내던진다.
그는 묵묵히 편지봉투를 열어 제껴 안의 편지를 읽는다, 사실 내용은 짐작이 되었다. 짐작이 되니까 여기까지 온 것이기도 하고.

 


[친애하는 브랜든 L. Choux의 부친 되시는 루덴 P-E Choux께.

 

일전의, 손자 되시는 몽블랑 C. Choux 경과의 연락에 대해 깊은 감사의 말씀 전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가 추천해주신 인사 중 일부와의 협상이 끝나, 저희 레드몬드의 사설 탐정 업무가 용이하게 진행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과연 호그와트의 졸업생 분들이군요, 손자 분과 같은 인재들이 많아 협상이 몹시 잘 풀렸습니다.

추후 손자 분의 댁에 들러 제대로 된 사례를 드릴 수 있길 바라며, 그를 위한 추천서로써 이 편지를 부칩니다.

 

사랑을 담아, 슈가 레드몬드.]

 

 

과연 슈가씨, 나의 문제를 잘 알고 이쪽으로 곧장 연락을 잘 넣어 주셨다. 양친 쪽의 인맥은 과연 나를 구해내는 것이었다.

 


"레드몬드 쪽에 연락을 넣었다고."
"네."
"왜 그랬지?"
"이웃끼리는 돕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참 뻔하고 단순한 사유를 대며 방긋 웃기나 한다. 그 낯이 제법 거슬렸는지 큰 어르신네 이마 주름이 깊어졌지만, 그는 일부러라도 내색하지 않는 양 말을 이었다. 정치싸움은 먼저 배를 보인 쪽이 지는 치킨 게임이다, 더불어 저 쪽에서 '그깟 것에?'라고 옆에 젊은이가 뻔히 앉아있는 상황에서 대꾸할 리도 없으니 염려할 것 없다.


"레드몬드 쪽에서 인력난이 있다는 것을 학기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를 돕고 싶어서... 몇몇 연이 있는 호그와트 졸업생 몇 명을 그에게 추천해 주었어요."
"용케 알았구나."
"호그와트 학생이라면 누구나 호그스미드에 외출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마법사 사회에 있어선 예언자 일보가 거의 유일한 공적인 언론이지만 사적인 언론으로 가면 수단은 얼마든지 있다, 당장 졸업생 안에도 데니스 출판사가 언론사의 역할을 일부 수행하고 있기도 하고.
졸업 전 마지막 외출일 셈이었던 호그스미드 소풍으로 그는 제게 힘이 될 정보를 싹 모아왔을 뿐이다. 그 중 하나를 곧장 실행해여 나의 실적으로 삼았고...


"다행히 추천드린 인사들 중 몇이 곧장 채용이 가능한 수준이었다는 뜻이죠."
"그래, 레드몬드는 비록 푸른 피에 얽매이는 작자는 아니지만... 그의 사회적 입지를 생각하면 이 또한 나쁘지 않은 조력이지."
"네. 그리고 이 건은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릴 이야기와 이어지며-"
"-네가 낼 결론은 이거겠군. 마법부에는 가지 않겠다."

 

 

애초에 거기에 갈 셈이라면 우리와 만날 필요 없이 곧장 시험을 치면 되니까 말이다, 그렇지?

 

 

 



“봉사를 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 밸런스가 있어야하는데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다는 걸로…”
“네에, 밸런스 조절이죠. “

 

"다른 가족들은 방을 옮기거나, 아예 집 밖으로 나가거나 하더라.

거주하는 곳을 바꾸니까 당장 손 볼 곳이 많아서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야.

이것도 다 싫으면... 바쁘게 사는 방법밖에 없지. 단점은 시간이 나면 오히려 더 조용하게 느껴진다, 정도일까?"

 


 




"예. 집을 옮겨, 인재를 있어야 할 곳에 보내는 일을 하겠습니다. 흔히 헤드헌터라고 하죠."


타인에의 통찰력이 아주 뛰어나다고까진 스스로 말하지 않겠다, 다만 당신들이 나에게 가르치고 싶었던 자질은 분명 이것일 테고, 나는 합격점에까진 섰을 것이다.
다만 당신들은 그 자질로 내가 마법부로 가던가 하는 것을 바랬겠지. 더불어 내 NEWT 성적이라면 분명 망각술사 등의 고위직에서 쉽게 설 수 있을 것이다. 그 길을, 내가 바라기만 했다면.


"프리랜서가 되겠다는 말이냐?"
"그야 현재의 이 사회엔 헤드 헌터에 관한 조직은 딱히 없을테니 제가 제 발로 뛰어 발품을 뛰는 프리랜서가 되긴 하겠죠."
"할 수 있겠다고?"
"다행히도 저는 미련한 양친 덕에 인맥이 꽤 있습니다, 이번 건과 같이 말이죠. 원래라면 당신께선 레드몬드의 인력난 문제도, 이를 해결할 타 인선도 의식하지 않으셨겠죠."
"그리 필요한 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말이다."


핑계가 좋군. 그저 비짓 웃으며 그런 욕을 삼켰다.
나도 더불어 좋은 핑계를 대어 주어야 저쪽에서도 납득 하게 생겼다.


"레드몬드 건이 제 첫째 실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전에도 무언가 있다고?"
"물론 공표된 것은 아니지만요."

 

 



"너가 원한다면 기꺼이 네 야망을 위해 거짓말을 해줄게. 너가 평생 모범생인 척 살 수 있도록 도와주마. 그리핀도르의 최악의 사고뭉치를 예의 바른 수석의 학생으로 만들었다니, 얼마나 좋은 미담이야.
너가 원한다면 기꺼이 내 세계를 보여줄게. 무뢰배가 가지고 있는 세상이 무엇인지. 가식 하나 없는 솔직함이 얼마나 많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 또 누군가의 패를 얼마나 약탈할 수 있는 지 보여주마."

 






"호그와트 재학 도중 짐승 한 마리를 사람으로 키워낸 것이 있습니다. 매년 방학 직전까지도 마무리 과제를 하던 녀석이 드디어 OWL에서 성적을 나쁘지 않게 받아오더군요."
"우리에게 증명되지 못하는 실적인가."
"그쪽 분네 NEWT 성적을 제가 알지 못해서 말입니다, OWL 쪽이라면 증명할 수 있겠지만."


추후 그의 NEWT 성적을 전해들었을 때엔 이 시점에 그가 그 점수를 보지 못한 것이 다행인 일이었다.


"다만 제 OWL과 NEWT 쪽은 증명이 되었을 테니, 이 상승폭을 그 쪽 분네 것에 대조하면 대략 비슷한 값은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 판단이 아주 글러먹을 뻔했다는 말이니 말이다. 다행히 이 제법 그럴듯한 통계 오류는 당시의 그와 큰 어르신을 착각케 하는데엔 충분했다.
그가 대표적인 사례일 뿐으로 이 외에도 여럿 사례는 증명 되어 있었다, 정말 오러가 된 카밀라로부터의 연락 역시 그에게 있어선 큰 힘이 되어주었고. 과연 나의 완벽을 꾀하려 한 행적과 실적은 드디어 그의 무거운 입을 들게 하였던 모양이지.

 

딱히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학창시절부터 대강 이해했던 사실이다만. 나는 남을 가르치는 데에 꽤 자질이 있어 보였다. 되려 내가 직접 실적을 내는 것 보다 가르친 타인이 노력하는 것을 보는 쪽에 더 즐거움을 느끼는 지경임까지도 짐작이 되어 갔기에.

아주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까진 아니면서도, 나의 인맥 등의 자질을 살릴 수 있고 더불어 어느 정도 내게 있어 맞을 법하고 이해될 만한 일을 찾아낸 그 절충안이 이것이었다.

 

 

 

"오로지 네 인맥만으로 이게 가능하다고?"

"불가능해 보이십니까?"
"...여러 시설과 기업을 전전해온 네 양친네 커넥션이라면 당장 빅데이터는 제법 쌓여 있기야 하겠군. 영국 안에서만 봐도 꽤 넓겠어."
"더불어 호그와트 졸업생이라는 메리트도 있고 말이죠. 이런 일을 하는 후계가 슬슬 필요하시지 않았습니까. '인재를 있어야 할 곳에 보내는 일'을 하는 사람 말이에요."
"그래, 언제까지고 그래프 따라 장물이나 사고 팔 수는 없지. 사람을 파는 것도 나쁘지 않은 장사다."


...뭐, 저쪽에선 부정한 인사 등용 및 청탁을 생각하고 있겠지만 말이다. 그 부분은 나중에 해결할까. 일단 중요한 것은 이 일로 독립하는 것을 허락받는 것과...
내가 하고 싶은 다른 일을 하나 더 하는 것을 저쪽에서 넘어가 주는 것.
여기까지가 성립 되어야 비로소 이 협상은 원만히 나의 승리로 끝날 수 있다.


"거기서 한가지 더 제안이 있습니다."
"무언?"
"이사 후 헤드헌터 일을 하는데, 그 집무실의 건물에 다른 사업을 하나 더 차릴 겁니다."

 


"오러를 하라고 했지, 오래 하라곤 안했으니까 잠깐만 하고 때려친 뒤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

 


 

 

 

말해두지만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타인에게 아무 대가 없이 친절을 베푼다거나, 그저 타인의 기쁨이 즐거워 웃는다거나, 제 속 안 챙기는 그릇 큰 바보가 결코 아니다.

다만 그런 인간인 척 스스로를 위장해 위선적인 행보를 보인 것이 자그마치 17년이었다, 질리지도 관두지도 않고 이 길을 고수해온 현 시점에선 이제 좋은 사람인 척 해온 친절 없이 나를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 다다른다. 그보다도, 정말 이것이 위선인가 하는 의문도 떠올랐기에...

 

이 정도로 나와 가까운 단어라면, 기꺼이 나의 삶인 셈 쳐도 그렇게까지 내게 유해하진 않을 것 같았다.

 



"기존 저의 양친과 제가 하던 후원 일이 있지 않습니까."
"아아, 그것. 지금은 전부 네 명의로 돌려 놓고 있던가? 그 건 말이다, 반은 성인이 되어가고 반 정도가 남았는데. 이후 처리할 곳이 있느냐."
"처리하지 않습니다."
"뭐?"
"후원을 관두고, 집무실 건물에 보육원을 차려 그 아이들을 제가 직접 돌보겠습니다."

 

어차피 집무실 하나 차리기엔 땅이 아깝지 않습니까.
큰 어르신과 젊은이의 미간이 살짝 꿈틀,하고 뒤틀린다. 순탄하고 적절한 사업을 잘 골라 가나 싶더니 갑자기 급커브라도 하는 것을 보는 꼴이다.

새삼 집에서 하라 하지 않은 일을 시도하는 데에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한지, 그 무게감이 슬금슬금 기어 오르는 감각에 휩싸였다. 억겁같던 침묵이 지나서야, 큰 어르신 쪽에서 침참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한 숨 한번마다 뼈를 에는 냉기가 밀려오는 것 같았으나, 그럼에도 나는 등을 곧게 펴고 앉아 웃는 낯을 지을 수가 있었다. 참,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네 어미아비와 비슷한 말을 하는군."
"그쪽 분들에 비하면 제가 훨씬 현명하지 않습니까?"
"어떤 부분에서?"
"일과 봉사의 밸런스를 잡겠다는 부분과, 전 세계에 부를 재분배하려는 야망까진 없다는 부분에서."
"우문이다, 애시당초 그런 선택을 한다는 부분에서 다르지 않아. 네 눈은 그들과는 다른 색을 타고났지 않느냐."
"그렇다고 양친께서 물려주신 일을 내버리는 것도 집안 이미지에 있어 뭐가 되겠습니까."


한 번 품에 안은 사람을 대단한 명분 없이 내버리는 것 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지 않습니까? 그들만큼 우리들의 치부를 잘 아는 존재도 없을 터인데.

아니, 그들이 아는 치부 정도야 네겐 문제되지 않는다. 네가 너희에 관한 소문을 무시했듯이 그렇게 대처하면 될 뿐이지 않느냐. 그런 거다, 해명하려 노력하지 말고 그저 쳐내기만 하면 되는 거야.

 

 

 


"잡아 먹어버리지 그래? 방심하고 있을 때."


 

 

 

"...기왕이면 그런 소문도 나지 않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몽블랑."

"더불어 '그런' 헤드헌터 일을 하려면 당연히 이미지는 손상됩니다, 어느 정도는 좋은 일을 하며 사회적 보신을 챙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게 그리 가르치신대로 말예요."

"우리가 아니라 네 양친이 가르쳤지."

"하지만 틀린 가르침은 아니죠."

 

 

차마 누가 생각하겠습니까? 애를 돌보는 사람이 꺼림직한 일을 할 거라고. 블랙 기업에서 이미지 보전을 위해 거금을 턱 기부금으로 낸다거나 하는 일은 흔하다, 이 역시 그런 활동의 일환일 뿐이라고.

...물론, 실상은 이미지 관리가 아니라 정말 그저 나의 적성과 마음을 따를 뿐이긴 하였지만. 말을 이렇게 해 두어야 저쪽에서도 꺼림직함을 해소하고 내게 많은 권한을 쭉 위탁할 것이다.

 

 

후우, 한숨을 한 차례 깊게 내뱉나 싶더니 한참 말이 없다, 억겹같이 흘러가는 침묵 속에 나는 잘도 곧게 앉아 있었다.

 

 

"나로썬 확신이 서지 않는구나, 네가--"

"자질이 없어 보이십니까?"

"...아니."

"그렇다면 무엇이."

"네가 갈고 닦은 그 이가 우리를 물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아, 이 영감 눈치가 빠르네. 내가 이 영감한테 배운 것이니 당연한가.

달리 하자면 이 말을 굳이 말로 꺼냈다는 데에서 천칭이 내게 기운 것이 대략 이해되었기 때문에. 다시금 방긋 웃는 낯으로 새로운 말을 꺼낸다.

 

 

"저는 충분히, 여러분께 받은 기대 만큼의 행동을 하고 있을 셈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런 양친 밑에서 당신들께 순순한 성정으로 잘 자란 것과, 좋은 성적 및 실적을 내어 결국엔 돌아온 것 모두 제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완벽이었을 테죠."

 

 

그러니 이제 여기에서 더 베팅을 하시려면 제가 아니라 여러분 쪽이 아닐까요? NEWT의 성적 통지도 된 참에 저로썬 이 이상 무엇을 증명하면 좋을지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들께, 지금의 제가 무엇을 들으면 가장 기뻐할까요. 저는 그다지 머리가 딱딱한 부류도 아니며 당신들의 행동을 이해할 셈에 있습니다. 더불어 지금이 아니면 저는 다시 바빠지며 이곳에 찾아올 일도 드물테니, 편지로 전하기 곤란한 신뢰를 보이는 것이 가장 유리하지 않을까, 하고.

 

 

딱히 이 말에 감화되어 대단한 말을 해 줄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나 답게 대꾸했을 뿐이었는데.

생각보다 저 쪽에서, 느릿하게 다른 이야기를 해 오는 것이다.

 

 

"...몽블랑, 일전의 사고 건은 말이다."

 

 

...눈치가 빠른 것에 비해 나에 대한 신뢰도가 참 높으시군. 나의 실적과 미래를 정말로 기대라도 하는 듯이 보이지 않나.

 

 

"...예에."

"네가 우리를 의심할 것을 안다, 실제로도 네가 성인이 되고서도 네 양친이 행동을 바꾸지 않으려 들었다면 네게 경영권을 주기 위해 시도했을 것도 부정하지 않으마. 하지만, 결국 그것은 정말 우리와는 관계가 없는 사고란다."

"아하, 그럼요, 구태여 해명하시지 않아도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 말을 믿는다는게 아니라, 당신들이 정녕 결백할 지언정 당신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으로. 더불어 아주 하얗지도 않다는 것도 방금의 말로 납득하였고.

 

 

"다만 그 사고가 널리 퍼지면 앞으로의 네 인생에 누가 될까봐 그런 것이야, 알지. 마법약의 라벨이 잘못 붙는 사고는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니까. 이 건이 대서특필 되었다면 여러 마법약 제조사에서 문제 삼을 거고, 이를 반례 삼으며 이 사건을 오랜 시간 끄집어 내겠지. 그건 네게도 누가 되고, 상처도 될 거다."

"그럼요,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그 사고가 난 것으로 결과적으로 나의 양친을 치우게 되어 아주 큰 이득을 보았다는 것 역시 압니다. 물보다 진한 피로 이 사건을 직시할 나의 선택권을 일단 모조리 빼앗아 놓고선 나를 위한 거였다고 뒤늦게 변명하고 있는 것 역시도 말이죠.

양친과 같은 미련하게 착한 사람으로 탈색될 의향은 요만치도 없다, 애시당초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아주 새까만 성정 그대로 살아갈 수도 없었다. 결코 나는 그럴 수가 없다.

저 쪽에선 베팅일 셈 치려 들었을 사고의 진상이 되려 그에게 있어선 판을 엎을 마지막 동기로 작동하게 된 것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제 인생에 제가 훼방놓을 리 없지 않습니까, 저를 그렇게까지 염려해주실 필요 없습니다. 알아서, 잘 해낼 테니."

"그래, 그렇지..."

"그래도,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로썬 이제 확신을 갖고 움직일 수 있겠군요."

 

 

그 확신이 당신들을 살릴 지 죽일 지는 모르겠지만요.

일전에는 나와 나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내뱉었던 말을 다시금 하며, 그 선에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테이블과 의자를 정리하고, 그들로부터 돌아서 나가는 길을. 젊은이 쪽은 따라 나서야 하나 큰 어르신의 눈치를 슬금 보고나 있었다.

저쪽에겐 대단한 원한이나 감정이 없다, 요컨데 남이다. 남의 마음 씀씀이를 굳이 헤아릴 생각은 들지 않는군.



"몽블랑."
"예에."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않은 채로 큰어르신은 나를 붙잡듯이 말을 건다.

 

 


"기대하고 있다."

 

 

 


나는 그저 웃음기 진 낯으로 한번 돌아 보기만 하곤, '실례하겠습니다.'하는 인삿말만 남긴 채 그 저택을 빠져나왔다.
가는 길에 사용인들로부터 차라도 한 잔 더 들자느니, 코트가 구겨졌다느니 하는 제안을 들었지만 전부 적당히 응대하여 그 자리를 벗어난다.

또각 또각, 정돈된 발걸음 소리. 그 보폭이 점차 빨라지고 있다는 것은 추후의 그 자신조차 알지 못했다.

 

 

 


 



저택의 큰 정원까지 지나쳐 제대로 밖에 나선다.

대문을 지나쳐 나가는 것으로 빌어먹을 연은 아주 끊어지진 않을 것이다, 추후의 지원까지 받아먹은 후에야 끊을 수 있게 되리라.

그럼에도 그에게 있어선 큰 진전이었다, 결과적으로. 끊을 연은 끊고 아닐 것은 냅두자는 첫 째 행동이었기 때문에.

 

 

"냅둘 것..."

 

 

일 년에 한번은 근황 보고 겸으로 여럿에게 연락을 한다는 것이 있었지, 돌아가서 이사가 끝나면 일괄로 연락을 드리자.

 

훨씬 날이 저물어 하늘은 살짝 붉었고 바람도 선선하다기 보단 싸늘했다. 붉은색 혹은 백색의 돌을 쌓아 만든 시계탑과 건물들을 지나치며 저들끼리의 세계를 부풀리며 웃거나 화내거나 혹은 넘어지는 사람들이 시야에 스친다.

간혹 가자 편지를 물고 날아가는 부엉이와, 사진이 움직이는 신문을 배달하는 사람과도 지나친다. 모두나가 나를 모르는 채로 그저 인사한다. 굿 이브닝, 굿 나잇. 오늘은 좋은 날이에요, 당신께서도 부디 행복하세요. 거기 젊은 분, 날이 추우니 빨리 들어가 보세요! 가는 길에 신상 초콜릿 하나 어떠세요? 가족분에의 선물로 딱 좋답니다!

 

그 무엇에도 시선은 느껴지지 않는다, 시선보다도 먼저 소음이 느껴졌다.

소음과 적절한 거리감, 나와 직접 친애를 나누진 않지만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저 마주하고 있다는 정도의 관계.

귀를 에는 그 소란한 감각에 나는 그제서야 내가 이 세상에 올바르게 들어섰다는 실감이 들었던가. 매사에 모든 것을 의심하거나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이를테면 평범한 학생마냥 서로를 대하는 걸로 충분한 나날과 같은 실감을.

고작 학생회장을 하는 것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는 양 태연히도 선을 넘어 침입해 들어온 다른 세계의 주인들과 웃거나 기대거나 싸우거나 했던 나날을...

 

 

 


"7년간 수고 많았고, 졸업 축하해. 네가 원한 완벽을 얼마나 네가 만족할지 알 수 없지만, 여전히 위로가 필요할 땐 쉬게 해줄께."
"학생회장 님, 건강하시고 그대가 원하는 인생이 되시길. 물론 행복을 기반해서 말이죠."
"7년간의 노력에 결실을 맺는 것이 졸업이라고들 하니, 나중의 네가 무슨 일을 하던지 그게 도움이 될 거라 본다.

아무튼 앞으로도 좋은 일 많이 있길 바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인연이 서로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어디선가, 스쳐가는 인연을 엮은 7년이 헛된 시간이 아니였길 빌며.

어디선가 우연히 마주하더라도, 안녕. 오랜만이야. 하며 웃으며 인사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인연이 되었기를 소원합니다."


 

 

이윽고 나는 몸을 숙여 인사한다. 몹시도 정중한 꼴로, 그러나 그다지 웃지 않는 얼굴로.

 

굿 이브닝, Dear my world. 친애하는 나의 세상이여.

내가 발 붙여 살아가 뿌리내릴 나의 완벽이 고른 나의 세계와, 그 세계에 기꺼이도 침범해온 빌어먹을 이방인들이여!

이제 저는 정말 모든 것이 괜찮을 셈입니다, 그러니 부디 그대들의 앞날에도 모든 것이 괜찮길, 그 나날을 먼 발치로나마 관망할 수 있길, 혹은 침범할 수 있길.

 

 

이 제멋대로 엉망으로 얽힌 소망을 다 담지는 않은 채 딱 한 줄로만 이 이야기를 끝맺기로 하였다.

졸업 축하해요, 나와 다른 색을 가진 모든 별과 같은 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