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불명 미소녀 관찰 연구일지는 소거되었습니다
2023. 12. 30. 17:36

 

 

 

"약간의 소음 뒤로 녹음기에 녹음된 인간의 목소리가 들린다. 목소리는 격정적이다. 말투나 말씨를 들었을 때 당황한 것이 티가 난다. 마치 억지로 무언가 기록한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투다."



관찰 기록 일지 제 1번. 날짜는.. 잘 모르겠군. 대체 여긴 뭐 멀쩡하게 있긴 하는거야? 시계도 이 시간이 맞는지 모르겠군. 여긴 오후 9시 10분이라 적혀 있는데, 해가 중천이라고. 쯧, 여하튼 컴퓨터도 엉망이고.. 종이도 멀쩡한 것도 없고.. 멀쩡하게 기록할 수 있는 게 이 녹음기 뿐이라니 말이 되냐고.



"녹음기를 이리저리 살펴보는 듯이 부스럭거리는 잡음이 섞인다. 녹음기가 그리 비싼 기종이 아닌 것을 그 부분에서 알 수 있다. 제대로 녹음을 하려고 마음을 먹고 샀다면 이런 잡음쯤은 잡아줄 수 있는 기계를 샀을 것이다. 그 잡음 사이로 녹음하는 인간의 한숨소리가 섞인다."



그래서.. 이 빌어먹을 관찰 기록 일지. 그래, 관찰 기록 일지를 녹음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야겠다. 이 빌어먹을!



"하하하. 아, 미안해요? 에잉, 웃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게 너무, 풉, 웃겨서. 아, 대본대로 해야하는데, 습. 쉽지 않네. 큼큼. 인간은 자기 숙소에 있는 의자를 걷어찬다. 자기 분에 자기가, 크흐흐, 아, 미안하다니깐. 그치만 제 입장이 되어보라니까요? 크흠, 한참 본인이 발로 찬 부위에 아파하던 인간이 말을 잇는다."



그 이상하게 생긴 괴물이.. 아니, 아, 짜증나 미쳐버리겠군..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한 침대의 위에 누워있었다. 내가 기억하는거라곤 내가 30살때까지의 기억 뿐. 분명 여긴 내가 살던 자취방도, 내가 다녔던 대학도 아니였다. 그런데 내 옆에 떡하니 뭔, 거지같은, 연구원 가운을 빨래더미처럼 덮고 다니는 뭔 미친 놈이 있는 게 아닌가.



"아저 이거 너무 웃긴데 이거 끝까지 해야해요? 아~ 이제 막 시작했는데 무슨 소리냐고요?"



이 버러지같은 삼류 SF C급 영화의 시작같은 이 상황은 대체 뭐냐고!



"아, 정말 이 부분 너무 웃겨 죽을 것 같아요. 배 아파 찢어질 것 같아. 삼류 SF C급 영화래."



하.. 그래서, 다시. 정신 차리자. 디오니시아 레바논. 그래서 내가 비명을 지르며 배게를 던지고 발버둥을 치는 그 때, 그 미치고 팔짝 뛰겠는 괴물이 하는 말이 뭐였는지 아는가. '갑작스럽지만 이 괴물을 연구해 주셔야 겠습니다!'였다. 그 소리를 듣고 나는 '예, 그러겠습니다!'라고 했다. 겠냐? 내가 미쳤냐? 대뜸 그러게?



"하, 이게 관찰 기록 일진지, 아니면 그냥 연구원님의 비명 모음집인지. 이거 블랙 코미디같은 건가요?"



나는 그 괴물에게 물었다. '뭔 개소리야?' 괴물이 말했다. '전 개가 아닌데요? 혹시 방금 자다 깨서 일어나서 눈이 잘 안 보이나요? 어쩌지? 아니면 좀 뇌가 어떻게 된 건가요? 뭐로 때려서 고쳐야하나..' 하, 그 때부터 골이 아프기 시작했다. 이 앞에 있는 존재는 뭔지. 자기가 괴물이라고 하나, 생긴 건 별로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이 인간은 대체 무엇인가. 할로윈 장난? 만우절 농담? 그렇다기엔 내가 너무 멀쩡하고.. 그리고 저 인간 등이 사람이라기엔 너무 부풀어있지 않은가. 뭔 이런 미쳐버린 상황이 다 있나.

여하간에, 왼손 중지 손가락을 펴고 있는 나에게 다가온 그 괴물은 상황을 설명했다. 이 곳은 연구소라고. 나는 연구원이라고. 내가 왜 연구원이냐고 물으니 자긴 모른댄다. 난 언제.. 연구소에 취업을 한거지? 분명 졸업할 때에는 대학원생이였는데? 그러면서 대뜸 지금 나선붕괴라는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마치 좀비 바이러스처럼 퍼지고 있어 사람들이 괴물로 변하고 있단다. 그리고 나는 그 바이러스의 세계 유일한 면역체이며, 자기는 전대미문의 미스테리한 감염체니 뭐니 개소리를 늘어놓는데.. 뭐, 이건 나보고 어쩌라는건지.. 그러면서 박수를 치며 하는 소리가 뭐라는 줄 아는가.



"자, 그럼 지금부터 연구를 시작해보겠습니다~ 박수~"



진짜 돌았나?



"에엥, 말했는데도. '괴물이 된 인간'이 등장했으니 이걸 인간으로 돌려 놓는 게 클리셰라니깐? 미녀와 야수에도 나오잖아용."



그렇게 나는 이 답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가볍게 돌아보니, 이 곳은 폐쇄된 공간으로 보이고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이야기를 듣자하니 이 연구소 바깥에도 마찬가지인 상황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이러한 괴물이 있는 게 말이다. 이 무슨, 내가 좀비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도 아니고. 어쩌자는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난 이 좁아 터진 연구소에서 어찌 살아먹으라는건가. 미쳐 돌아버리겠네.. 그래서 나는 지금부터 이 괴물의 관찰과 연구를 해보고자 한다. 어차피 밖으로 나가도 답도 없고,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일단 식량이나 지금 내 상태에 대해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니까. 일단 기록을 끝내겠다.



"녹음기의 목소리가 끊긴다. 다음 녹음이 재생된다."



관찰 기록 일지 제 2번. 날짜는.. 1번 기록을 남긴 후 해가 한 번 지고 뜬 다음 날. 



"전의 관찰 기록 일지보다는 차분한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다."



이 연구소, 아니, 정확히는 쉘터에 대해 살펴본 내용에 대해 기록하고자 한다. 먼저 본 연구소인 제 1 연구소는 총 6개의 방으로 나뉘어져있다. 차례로 식당, 제 1 연구실, 자료실, 숙소가 있으며 반대편에는 표본실과 창고가 있다. 괴물에게 받은 카드키를 통해 안 쪽을 전부 살펴봤다. 내가 지냈던 숙소조차도. 먼저 이 상황이 장난이 아닌 실제 상황임을 표본실과 제 1 연구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표본실의 안 쪽에는 유리병에 들어 있는 인간의 뇌들이 있었다. 인간의 뇌들에 벌레의 가시들이 둘러 쌓여 있었으며, 그 갯수는 대략 80개는 넘어보였다. 괴물의 말에 따르면 본인이 다가가면 뇌는 살아있는 인간인 양 목소리를 낸다고 했다. 이는 추후에 실험을 통해 확인해볼 예정이다.

제 1 연구실에는 표본실에 있던 뇌와 나의 세포, 그리고 괴물의 세포로 연구를 하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프레파라트에는 H.C라는 용어가 적혀 있었으며, 그는 괴물이 말하는 바이러스인 듯 보였다. 그 바이러스는.. 일종의 생명체였다. 생명체라고 묘사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움직였으며, 웃었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느꼈다. 이건 현실이라고.



"인간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것은 공포, 그 이상의 것이었다. 경외감? 두려움? 혹은, 자신이 범접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압도감. 다양한 감정이 마구잡이로 엉켜 인간은 입을 열지 못 했다. 한동안 녹음기 너머론 숨소리만이 들렸다. 급하게 들이키는 숨소리가 그 인간이 평정치 못 함을 알려줬다."



나는 필사적으로 연구소에 남아 있는 연구 기록들을 뒤졌다. 본 연구소인 제 1 연구소에는 그 기록들을 찾을 수 없었다. 자료실에는 이해할 수 없는 책이 꽂혀 있었다. 신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으나 정보값이 너무 없어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외에 전염병에 대한 책들이 있었으나 이 상황을 타파하는 덴 도움이 되지 못 했다. 가장 필요했던 연구 진척이나 실험에 대한 정보 같은 건 없었다.

분명한 것은 나는, 아니, 정확히는 '나'는 이 연구소의 일원이었다는 것이다. 프레파라트에 남아 있는 '나'의 글씨나 괴물이 준 ID카드를 포함하여 모든 게 선명히 내가 이 연구소의 소속이었다는 걸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대뜸 괴물에게 납치된 생판 억울한 인간 하나가 아니라. 내가 잃어버린 기억 속의 '나'는 분명히 이 바이러스를 연구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알 수 없었다. 그럼 왜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 만일 '내'가 이 바이러스를 연구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자 했다면 분명히 그 기록들을 모아놨을 것이다. 그 '괴물'에 대한 것도. '내'가 나의 행적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라면 어디에 자료를 숨겨놨을까 고민했다. 애초에 왜 이 본 연구실에 자료를 비치하지 않았지? 누군가가 열람해서는 안됐나? 온갖 고민을 하던 끝에 나는 내가 사용했다는 숙소의 문을 열었다. 안은 처참했다.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였다. 안은 그렇지 못 했다. 화장실은 거울이 깨져 유리조각으로 엉망이었다. 분명히 흰 타일로 되어있었을 회장실의 바닥은 붉은 갈색빛이 돌았다. 미약하게 썩은내가 났다. 쇠냄새와 함께 화장실 특유의 암모니아 냄새가 지독하게 풍겼다. 그 자리에서 변기를 잡고 속에 있는 것들을 뱉어냈다. 먹은 것이 얼마 없어 무언가 나오지도 않았다. 방의 서랍 속에는 담배와 라이터가 있었다. 그리고 물건을 자르는 데 말고 다른 데에 사용한 것 같은 커터칼도 같이 놓여 있었다. 화장실과 같은 쇠냄새가 났다.

그 때 깨달았다. '나'는 이 사태를 해결하는 것을 포기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록을 쌓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묻고 싶었다. '너는 대체 왜 그를 포기했는가?'라고. 나는 대체 어디서, 무엇을 겪었길래 이지경까지 이르렀는지에 대해 질문하고 싶었다.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 연구소에 있었는가? 그리고 나는 그 시간 동안 대체 무슨 일을 겪었는가? 그런데 왜 나는 그 '나'의 기억을 떠올리지 못 하는가? 그리고.. 그 괴물은 대체 이 상황에 대해 무엇을 알고, 나의 무엇을 알고 있는가.

나는 궁금해졌다. '내 자신'이, 그리고 저 '괴물'이. 나는 조금 더 이 본 연구소를 살펴본 뒤에 제 2 연구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잘 되길 빌어야지.



"다음 녹음이 재생된다. 이전 녹음의 목소리보다는 생기를 잃어버린 목소리다. 약간의 짜증과, 격정. 그리고 복잡함."



관찰 기록 일지 제 3번. 날짜는 1번 기록을 남긴 후 해가 네 번 지고 뜬 다음 날. 2번 기록을 기준으로 해가 세 번 지고 뜸. 이 말부터 시작해야겠다. 그 괴물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 전혀, 전혀!



"잉, 저보다 연구원님이 더 똑독하니까 잘 알잘딱해달라고 말 했어요, 난?"



내가 기억을 잃은 것도, 자기 자신에 대한 것도, 이 연구에 대한 것도 도통 제대로 알려주는 게 없다! 너가 인간 모습이면 다냐, 임마?! 골 때린다. 하루는 수갑을 들고 오더니 자기한테 채우고 침대에 고정시켜달라고 했다. 원래는 제 2 연구소에 방이 있어 거기에 갇혀 있었다나 뭐라나 장황하게 말을 늘어 놓는다. 그러면서 자신은 짐승이 된다며 잘 지켜보는 게 좋다고 이야기를 하는 게 미치고 팔짝 뛰겠다. 그리고 다음 날 자고 일어나보니 정말로 침대의 쇠가 부러질 듯이 휘어있는 게 아니겠는가. 정말 내가 이 멍청하고 도움도 안 되는데 머리만 좋은 이 괴물과 어떻게 살았는지 모를 일이다. 입은 살아 있어 가지고 나불나불거리는 게 사실 '내'가 연구를 포기한 건 이 괴물 탓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저 주둥아리만 좀 조용히 하게 할 수 있었으면 내가 이러진 않았을텐데..

여하간에, 지난 삼 일간 제 1 연구소의 자료들을 살펴본 후 제 2 연구소를 일부나마 살펴볼 수 있었다. 제 1 연구소의 나선붕괴와 관련된 자료들은 대체로 다 파쇄되어 있었다. 대체 '나'는 뭔 정신으로 이 자료를 파쇄한지 모르겠다. 심심해보이는 괴물에게 이 파쇄한 자료를 맞추라고 시켰다. 한참 멍청이씨가 한 짓을 왜 본인이 해야하냐며 난리를 치더니 맞추지 않으면 연구를 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니 그제서야 묵묵히 맞추기 시작한다. 내가 저 괴물에게 통하는 매우 합리적인 수단을 찾은 듯 하다. 그 뒤로 몇 가지의 자료를 더 찾으려고 했으나 엉망진창이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창고도 지저분하고, 먼지 투성이에 연구소 밖 나무들은 다 죽어가고 있다. 내 정신머리만큼이나 이 쉘터는 엉망이다. 여기서 어떻게 사람이 산다는건지, 원.

제 2 연구소로 넘어가야지 생각했던 그 날 밤에 제 2 연구소 쪽으로 큰 소리가 났다. 진동으로 인해 나무가 쓰러지고, 그로 인해 건물 일부에 스크래치가 났다. 덕턱에 자료를 읽던 중간에 불이 꺼져 한참 욕을 해댔다. 저 버르작머리 없는 괴물인지 뭔지.. 괴물에게 물어봤더니 소리를 내는 건 제 2 연구소 안에 있는 거랜다. 사슬로 문을 막아 놓고 있으니 건들지 말라고 했다. 그런 건 순순히 알려줘 놓고 왜 다른 건 안 알려주는 지 모르겠다.

제 2 연구소는.. 묘지였다. 여러 의미로. 시체들이 있었고, 썩은내가 풀풀 풍겼다. 난도질 된 시체들이 있었고, 부패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 사이 부셔진 컴퓨터가 있었다. 컴퓨터를 들고 와 본체만 연결해서 안의 데이터를 확인했다. 끔찍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왜 제정신이 아니였는지 이해했다. 그리고, 왜 나 홀로 살아남은지조차도. 그 바이러스는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였다. 나는 운이 좋았다. 내가 변모하지 않은 것조차 신기했다. 컴퓨터 파일에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실험한 모습들이 있었다. 계속된 사진들과 영상의 연속들에 지쳐 확인을 포기했다. 애초에 그 괴물이 한 폴더를 열려고 하니 갈갈히 날뛰어서 보다 만거지만. 솔직히 의문이 들었다. 이걸 확인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는지에 대해서. 파면 팔수록 연구의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다. 그저 막막할 뿐이다.



"다음 녹음이 또 재생된다. 어조 없는 목소리이다. 차갑지만,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아~.. 이런 것도 읽어야 해요? 싫은데.. 내가 들은 목소리 중에서 가장 차분한 목소리였다."



관찰 기록 일지 제 4번. 날짜는 1번 기록을 남긴 후 해가 일곱 번 지고 뜬 다음 날. 3번 기록을 기준으로 해가 세 번 지고 뜸.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솔직히 말해서 인류는 가망이 없다. 대충 '내'가 어떠한 것을 연구하고자 했는 지 이해가 갔다. 물론 그것이 내가 이 쉘터의 밖으로 나가야지만 확실히 장담할 수 있는 것일테지만, 저 괴물은 이 인류를 집어 삼킨 바이러스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연구소의 나를 포함하여.. 많은 연구원들이 그를 해결하지 못 한 것일테고. 그나저나 5년이라니 꽤 오래도 버텼군. 여기에 사람이 없어진 건 얼마나 된거지? 그 시간을 '나'는 얼마나 버틴거지?

제 1 연구소의 제 1 연구실의 약장을 뒤져보니 주사기와 각종 진정제, 수면제, 마취제들을 발견했다. 더 안 쪽을 살펴보니 착란을 일으키는 약품들이 있었다. 괴물에게 이에 대해 물어보니 그가 뻔뻔히 말한다.



"아~ 제가 그걸 안 치웠던가요? 깜빡했네! 에헷?"



에헷은, 무슨, 뭔, 에헷이야!



"아이 참, 애초에 거기에 그게 있을 줄 전 몰랐다고요. 그 퀭한 사람이 저한테 말 안 해줬는걸."



대체 왜 제 1 연구실에 이 약품이 남아 있는 지에 대해서는 딱히 큰 의문이 들진 않았다. 아마 저 괴물때문이겠지. 그렇다면 다른 의문이 올라오는 것이다. 그럼 이 약품을 '나'에게 쓴 것인가. 아직도 밍기적대며 파쇄 서류 퍼즐 맞추기를 하고 있는 괴물에게 주사기를 들이 밀며 물었더니 휘파람이나 분다. 저 놈의 주둥아리를 내가 어떻게 할 순 없나.. 내가 몇 번 역정을 내니 시끄럽다면서 콘스프 캔이나 내놓으랜다. 골 아프다. 안그래도 그 내 숙소의 전화기로 식량 요청을 할 수 있다는 걸 어제서야 알았건만 저딴 소리라니. 배에 거지가 들었는지, 자기도 생명체라고 온갖 투정을 부리는건지, 내가 육아를 하는건지 알 수가 없다. 분명히 '나'는 저 철부지 괴물때문에 미쳐버린 게 틀림없다.

 그래서 이 괴물을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하는가. 나는 또 어떻게 처신을 해야하는가. 평생 이 쉘터에 처박혀 살 것인가. 연구 진척이 날 때까지 여기서 골을 썩히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저 제 2 연구소의 괴물의 문지기처럼 여기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답이 나지 않는 의문만이 머리에 남았다. 답답하고, 복잡하다.



"마지막 녹음이 틀어진다. 어쩐지 이전의 목소리와는 상반된 목소리다. 뭔가, 놓아준 듯한 상쾌한 목소리."



관찰 기록 일지 제 5번. 날짜 1번 기록을 남긴 후 해가 열 번 지고 뜬 다음 날. 조만간 이걸 날짜로 표기해야겠다.

짐을 쌌다. 이 거지같은 괴물이랑 여기서 못 살겠다. 꺼지라 그러지.



"이 녹음에도 이런 소릴 해놨어? 이 멍청하고 쪼잔한 연구원이?"



사실 딱히 챙길 것도 없었다. 짐도 없었고, 식량도 얼마 없는 상황이고, 연구 결과도 제대로 남은 게 없으니 손 댈 것도 없다. 괴물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날 수 있습니까?' 괴물이 말했다. '눼?' 정말 강아지 장난감에서나 날법한 멍청한 목소리였다.



"끌래요. 짜증나. 아니, 왜 끄지 말라는거에요? 난 대본대로 다 했다고!"



나는 설명했다. 어차피 이 쉘터에서 답도 안나고, 표본과 조사도 부족한 상황에서 여기에 남아 있을 이유같은 건 없다고. 괴물이 말했다. 근데 왜 본인은 나가냐고. 내가 말했다. '내가 나가니깐.' 괴물이 답한다. '와우, 이게 바로 막무가내라는 건가요?'

팔짱을 끼고 내가 담배에 불을 붙혔다. 역으로 내가 괴물에게 물었다. 지금 진척상황이면 이 문제에 해결책이 나올 것 같냐고. 괴물은 답한다. 그건 그 쪽이 생각해서 머리 굴려야 할 일이지, 왜 본인한테 묻느냐고. 내가 대꾸한다. 그래서 내가 머리 굴려서 낸 답안이 이 빌어먹을 곳에서 나가자는 건데 뭔 불평불만이 그리 많냐고. 괴물이 손가락질한다. 지가 괴물이면 다냐, 이 예의범절도 어긋난 놈이.



"그 쪽이 먼저 어이없는 소릴 하잖아요!"



저 손가락을 뿌가트릴 수도 없고. 그래서, 나는 다시 설명한다. 어차피 여기 자료실에는 마땅히 도움이 될만한 자료도 없으며, 지금 당장 여기서 지금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정보를 얻을 수도 없고, 애초에 접근할 수 있는 더 많은 문헌도 없는데 이 연구의 진척을 바라는 건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그리고 어차피 인류는 다 망해버린 것 같은데 내가 그 남은 인생 여기서 골썩히면서 살 필요가 있는가?

괴물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묻는다.



"그게 연구원이 되어서 할 말이에요?"



나는 답한다. 그렇다. 애초에 나는 연구원이기 이전에 인간이지 않은가. 이게 인간으로서 받을만한 대우인가. 내 생각에는 충분히 많은 가량의 정신적 고통을 받은 것 같다. 너라는 존재를 포함해서.



"저같이 귀여운 존재가 왜"



헛소리하는 걸 배게로 쳐서 다물게 하고 나는 말을 이었다. 여기서 계속 고통에 매몰되어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 생각에는 이 사태는 너무나도 오래 지속되었으며, 돌이킬 수 없는 피해까지 미친 것 같다. 그런거라면 적어도 다른 변화를 물색하기 위해서 어디라도 가봐야하는 게 아닌가. 고인 물도 결국에는 썩는다. 제 2 연구소를 포함하여 지금 이 꼴이 고인 물이 썩은 게 아니면 뭐라고 표현할꺼냐. 내가 제대로 된 연구를 하려면 이곳을 떠야한다.

괴물은 복잡하다는 듯 머리를 헝클인다. 쌤통이다, 내가 머리 아팠던 만큼 그걸 겪는 꼴이 꼴보기 좋다. 괴물이 묻는다. 자신은 보균자고, 다른 사람을 감염시킬 수도 있다. 내가 나가는 게 과연 좋은 선택인가.

나는 대꾸한다. 감염자가 니 뿐이냐. 너 하나만으로 세상 망할거였으면 이 세상 전부 망했어야 한다. 애초에 지금 이 세상에 죽을 인간 얼마 안 남았을거다. 멀쩡한 사람도 힘들고 살아가고 있을 판에 뭔 그런 생각이나 하냐. 뭐, 그래도 너가 인류를 배려한답시고 여기에 갇혀서 지낼꺼면 날 이 곳 바깥에 얌전히 내려 놓고 너는 거기서 썩어라. 나는 모를 일이다, 라고.



"진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매정해요?"



개 풀 뜯어먹는 소리해서 괴물이 뭔 인간한테 온정을 바라냐고 욕 한 바가지 해줬다. 나는 그래서 물었다. 나갈꺼야, 말꺼야.



"그걸 지금 당장 여기서 정하라고요?"



나는 손가락을 굽히며 숫자를 센다. 다섯, 넷, 셋.. 괴물이 급하게 입을 연다.



"아니, 아니, 나간다고요! 나간다고!"



몸을 돌려 나는 괴물이 계속 읽고 있던 책 몇 권을 집어 던져 주고 짐이나 챙기라고 한다. 나는 괴물에게 말을 덧붙힌다. 계속 있었던 연구소에 작별 인사나 하라고. 마음이 걸리면 그 제 2 연구소의 문에 못질해놓거나 쇠사슬이나 더 해놓고 오라고. 괴물은 멍하게 책을 쥐고 서 있는다. 그건, 어쩌면 괴물에게 처음 쥐어진 자유였을지도 모르겠다.

괴물의 산발인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괴물의 다리 아래로 사박거리며 부딪히던 비늘 하나가 떨어진다. 바람이 분다. 너무 오래 펼쳐 봐 낡은 책의 일부분도 바닥에 떨어진다. 책의 낱장에는 눈이 오는 옥상 위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삽화가 그려져 있다. 무너져가는 세계, 죽어가는 사람들, 그 사이 지어진 쉘터에서. 이곳이 그저 세상이 무너가는 걸 지켜봐야 하는 최후의 장소가 될지, 혹은 되돌아봤을 때 그나마 따스했던 낙원이 될 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어떤 선택을 했던 간에, 선택을 한 것으로 우리는 무언가 바뀔 것이다. 그것이 어떤 미래를 선사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이 알 속 같은 쉘터의 너머에는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확실했으므로. 

쉘터 안에서의 마지막 녹음을 종료한다. 그리고, 우린 다른 풍경에서 첫 녹음을 시작할 것이다.

 

 

 


 

 

 

 


다 갉아먹혀 죽은 나무가 군데군데 겨우 서 있는 정원을 지나선다. 소리 하나 내지 않는 텅 빈 공간 안에 저벅저벅,하는 사람 발 소리에 차박차박,하는 조금 무게감 있는 비늘짐승 발 소리가 겹쳐 난다.
처음 눈 떴을 때야 하루아침에 사람 사는 냄새가 싹 사라진 양 보여져 을씨녕했지만 지금 와서는 제법 익숙하다, 이를테면 쓰레기나 먼지가 많이 쌓인 폐허에 불평불만을 쏟고선 담요를 깔고 짐을 정리해 공간을 만들어 놨더니 며칠 지나선 그 공간이 편안해지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다.

--그렇다 해서 내가 딱히 여기서 오래오래 살다 늙어 죽을 생각이 없긴 했지만, 그게 이런 형태일 줄은 몰랐다 이 말이다.
저기요, 저도 황당해요. 이 이야기를 읽고 계실 여러분, 저의 황당함을 좀 알아주실래요? 옆에서 '저거 또 뭔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거야'같은 눈으로 나를 보는 이, 이 사람이 지금 갑자기 급발진을 했단 말입니다.
오며칠 아주 꿍해져 있더니 갑자기 아주 산뜻한 얼굴로 '나갈테니깐 짐 싸십쇼'그러고는, '내가 나가니까 당신도 나갑니다' 이런다니까? 하? 제가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거, 당신?


"...진짜 열 다섯번째 말하지만 저 밖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정......부는 아마 살아는 있...겠...지만? 아마도?"
"죽었음 죽은거지 뭘."


우리가 사서 걱정까지 해야 합니까? 식량은 시키면 오는 것 같았으니 진짜 궤멸은 안 했을거고, 죽었건 어쨌건 지금 상황이 변하지 않을건 똑같은데. 참 시니컬하게도 덧붙이는 말이 참 다시금 황당하다.
아니, 이렇게 포지티브한 사람이었나? 내 기억엔 분명 이 사람 어제오늘할 듯이 겨우 숨만 붙어있었는데......



"정부에서 죽으라면 죽을 거에요?"

"그래야지. 다른 방도가 있나?"





...기억 소거제를 처방한 그 판단은 꽤 나쁘지 않았을지 모른다. 처방한 이후 그가 내내 연구실을 열심히 돌아다니며, 내가 봐온 그 어떤 때보다도 바보같이 지내온 그의 모습은 꽤나 볼만했지. 이전의 자신이 해 놓은 꼬라지라던가,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던 그의 악의를 그 스스로가 질려할때엔 이 장면을 찍어다 보여주고 싶을 정도였다니까. 

그렇게, 탈출에 대한 내 생각은 제쳐두고 상대의 뒤를 쫓아 나가고 있는게 지금 우리의 상황이었다. 그래요, 이게 정말 그의 옳은 판단이 맞다면 말이죠.


"있잖아요."
"또 뭡니까. 같은 말 또 할거면--"
"전 괴물이 사람의 권리를 뺏으면 안된다 생각하거든요."


물론~ 뭔 어중이떠중이들까지 '사람'으로 쳐줄 생각은 없지만요! 그것들한테 죽긴 싫으니 기꺼이 제가 찢어 드릴 수 있는데 말이죠. 덧붙인 말에 상대네 미간이 잔뜩 찌뿌려지긴 했으나, '계속 해봐'라는 양 턱짓한다.


"이를테면 제가 '저를 살려주세요'라고 당신께 부탁했다 쳐봐요? 그럼? 당신의 연구 방향은 저쪽으로 치우쳤을 거에요. 나를 살리는 방법, 나선붕괴 바이러스를 부작용 없이 분리하는 방법, 기타등등. 그죠? 아니면 제가 '여기서 나가게 해주세요' 뭐 이렇게 말했으면 더 이야기가 쉬웠겠죠, 당장 나가면 그만이라는 방향으로."

 


내가 사는 방법, 내가 나답게 사는 방법. 이 쪽으로 치우치느라 정작 그에게 중요했던 '세상을 위한 연구'라는 가치에서 멀어질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래서야 주객전도다, 내가 기억을 지워놓고 상대를 내 멋대로 부린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상대로썬 '저 괴물자식 아는게 없어'라는둥 불만이 많았던 모양이다만. 잉.)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 결과가 이상할 정도로 내 편의주의적으로 흘러가니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되도록 결과를 유도해버린게 아닌가?
나를 이곳에서 탈출시키고, 앞으로도 살아갈 수 있게 풀어주고서, 더불어 상대까지 의욕적으로 살려 구는 것까지. 혹시라도 내가 그의 판단에 또 감언이설이라도 쏟은게 아닐까?
-그거 진절머리난댔는데. 이번에야말로 그렇게 해서, 괜히 나때문에 상대가 흔들리거나 하게 하지 않으려고 내 생각을 최대한 말 안 하려고 한거였는데.


"...넌 매번 말이 길어, 하고 싶은 말이 결국 뭐야."
"오롯히 당신만의 판단으로 내린 결정이 맞냐는 거죠, 제가 옆에서 쏘삭인게 아니라."
"이거는 왜 내가 한참 물어볼땐 이상한 소리나 하더니 왜 갑자기 지금 멀쩡하게 말하지?"
"아? 웃기게 말 안 해주니깐 허전하세요? 언제 그렇게까지 저를 좋아하게 되셨담."


장난 삼아 한 마디 분위기 환기 겸해서 얹었더니 아오, 하고 머리나 한 대 더 얻어맞을 뿐이었다. 이야, 나선붕괴 바이러스 감염체를 이렇게 당당히 때릴 수 있는 사람 지구 상에 또 없을 거야 그죠.
상대 쪽에서 아예 내 쪽으로 몸을 홱 돌리는 것이다. 가는 길이 막히니 내 발걸음도 덜컥 제자리에 선다. 뭐에요,하고 대꾸하기도 전에 상대가 지긋지긋하단 양 한숨을 푹 쉬며 담뱃불을 꺼뜨린다.


"죽고 싶은 거면 죽여줄 수 있다."
"갑자기?"
"분명 난 내가 그렇게 판단해서 그런거라 했는데 네가 했던 말 또 하게 하고 자꾸 불평하는걸로 봐선, 너 살고 싶지 않은건가 싶어서 말이지."


너야말로, 그래서 뭐가 하고 싶은 건데.
나한테 그렇게까지 선택을 종용하고서, 약물로 기억을 지우고 나한테 우스꽝스런 연구를 지키며 이 종잇장같은 연구실에 스스로를 가두면서까지 어떻게 되고 싶었던 거냐고.
반대로 있는 대로 산을 다 끼얹어 죽으라고 했으면 순순히 죽었을 거냐? 아니면 평생 여기에 처박혀 실험체로써 살아가라 했으면 순응했을 거고? 기억 소거제를 다시 맞으라 했음 맞았을 거고?
바랄 대로 해줄 테니 말해 보라고.


듣고 보니 제법 데자뷰가 있었다, 이것과 거의 비슷한 질문에 분명 당시의 상대는 침묵을 택했었지.


"...오, 저 이거 알아요. 제가 분명 당신한테 거의 고대로 물어봤었어요."
"유감이군, 난 누구씨 때문에 기억이 안 나서."
"아~ 이게 이렇게 전세역전이 된다?"
"그래서 어떻냐고. 생각해보니 넌 내 의견은 물어보는 듯 하면서 네 생각은 말로 하지 않았지."


방금까지 길게 말 한것 같은데요? 긴 것 말고 결론만 취합해서. 넌 말을 할때 말야, 주저리주저리 겉치레가 많고 알맹이가 없어. 감언이설이니 뭐니 스스로도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면서 그 버릇이 안 고쳐지나?
며칠이나 봤다고 이런 소릴 하는지 원. 나를 똑바로 보는 녹색 시선에서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휘파람이나 휘휘 불며 한 바퀴 팽글 돌고 돌아오니 여전히도 그 자리에 서서 가만 보고 있는 것이다. 피해 가려고 옆으로 고개를 쭈욱 내미니 그 방향으로 자기도 휘적 휘적 몸을 기울이는 것이다.

저기, 저 지나가고 싶은데. 어, 안돼. 못 지나가.

 

 

"...말로 굳이 해야 해요? 안 하면 안 보내줘?"

 

 

대꾸도 없이 '당연하지'라는 양 턱짓이나 하는 것이다. 참 나, 이거. 어물쩍 넘기지도 못하게 이러나...

나는, 그리 윈더베리는. 정말 이런 속내 이야기가 싫다. 속이 답답해져 올라오기 시작하니 몸을 가만 두질 못 하겠다. 발 코를 바닥에 쿵쿵 찧으며 시간을 쭈욱 끌어 보았지만 상대는 꼼짝도 안 하고 쳐다보고 있었다.

딴 소리 할 거면 귀찮게 하지 말고 차라리 지금 하라는 양.


괴물을 인간으로 돌려놓는게 클리셰라느니 뭐라느니. 그에게 제공한 가이드라인 중엔 내 추후에 관한 것을 포함한 적은 없었다. 나는 인간의 체세포를 다시 갖게 될 지언정 인간일 순 없을 것이다. 나는 나의 악의를 알고, 그 악의가 하여금 인간사회에 있어 악영향이나 미칠 것임을 충분히 알기 때문에.

뭐 포함 해봤자 어차피 세계를 위한 어쩌고에 도움도 안 될거고. 언어화되지 않은 욕망 이야기를 꺼내는게 참 낯부끄러운 일이라 그다지 입에 담고 싶지 않았기에. 날것의 스스로를 드러내고 싶지는 않은 거야 당연한 사람 마음 아닌가?

 

이대로 이상한 소리나 하며 어물쩍 넘기고 싶었다. 나를 사람으로 보지 말고 대화도 의사소통도 안 되는 괴물 내지 NPC로만 보고 넘겼음 했는데... 그래, 결국엔 내가 말하지 않으면 책장은 영영 덮이지 않을 심산인가보다.

 



그냥, 나는. 그 모든 입 바른 말들을 제하고서 다시 말하자면. 


스스로 자기가 무엇이 하고 싶은지도 모르며, 그럼에도 적당히 착하고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하자며 매달려는 있는, 스스로 죽을 용기조차 없었던 운 없는 연구원을 보고서.
그 어중간한 선의를 이용해 좌천이나 보낸 세상과, 죽어서까지 그를 붙들어 매다놓은 과거의 인연들 등등에게 진절머리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

고작 저게 뭐라고, 저런게 뭐라고 사람 하나를 이렇게 말려 죽이고 있었을까?
사람의 마음은 이 괴물과는 달리 고갈자원인지라 이런, 희망을 다짜고짜 맡겨놓은 방식으론 고갈만 되어갈 뿐 희망이 없다 생각했고. 몇 번 몇 십번이나 반복된 실험 실패로부터 절망했음에도 총을 겨누는 손이 떨려오는 인간에게선 더 이상 고갈될 마음조차 찾아볼 수 없다 판단했다. 괴물에게 홀딱 넘어가기나 하는 지극히도 어중간한 사람에겐 애초에 불가능한 미션이기도 하다고. (어쩌면 괴물을 사람으로 볼뻔하기도 한 어중간히 상냥한 그에게 연민 따위의 사심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 이런 단어로 총칭되는 감각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구한테 채점이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서, 아예 리셋하고서 다시 묻고 싶었다.
당신, 디오니시아 레바논은. 당신을 몰아붙일 그 어떤 장해도 없는 상태에서 오롯이 당신의 주체적인 판단으로 이 상황을 어떻게 하고 싶은지를.
외부 요소를 모조리 배제하여 이런 종잇장같은 연구실에 스스로를 격리하곤 그리 계속해서 물어왔다. 무대 위에서 그 혼자만이 속는 웃기지도 않는 스탠딩 코미디 쇼나 열며, 마음이 없어 고갈될 일도 없는 나 홀로 고심하여 판을 끌고 가며.

그렇게 하면 당신은 나와 당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후회 없이 고를 수 있을까 하고.


이 모든 생각에 나는 없었다. 괴물의 처분을 괴물이 스스로 판단해선 안되지 않겠는가. 나는 사람이 아니고, 괴물은 사람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기 때문에. 어느 싸구려 SF소설마냥 아름다운 인간찬가따위 우리에겐 있을 수가 없다. 



"...깊게 생각해둔건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구려 SF소설을 읽고서, 분명 언젠가의 나는 인상깊다는 듯이 책장을 넘겼을 것이다. 그들과 내가 무엇이 다른지 고민하다가 어줍잖은 나레이션이나 외워 읊었을 지도 모른다.
진실을 알기 전까지도 탈출을 위해 연구실의 온갖 문을 열어 제꼈고, 출입구의 걸쇠가 어떻게 하면 열릴지 고심했고, 연구원 몰래 움직이기 위해 발소리를 죽인 일도 있었을 것이다.


"밖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전혀 모르고요, 괴물이 되기 전의 신분 같은 것도 전혀 기억이 나는게 없어요. 그보다 실험때의 기억도 저 거의 없다 봐도 될 거 같죠."
"있었어도 뭐 네가 그리 대단한 사람이었겠냐."


나가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세상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닌 내가, 실험체로써의 가치조차 없을 바깥에 나가 무엇이 될 수 있다고 그런 부질없는 짓을 했을까!
그럼에도 줄곧 나는 출입문 밖을 등지고 서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나갈 수 있을 것이라 의식하는 듯이 저곳에 신경을 쏟고 있었다. 상대 혼자선 탈출할 수도 없을 곳을, 나는 계속해서 봐 왔다.

갇혀 있는 세월이 길어지다 결국엔 저 너머를 보지도 않게 되는, 그 시절의 연구원마냥 열망이 사그라드는 일이 오지 않기를 내심 바래왔을 것이다.


"그래도 살아보고 싶네요."
"그래."

"당신이 저한테 유도된거건 어쩐거건 제가 더 신경 안 써도 되는 거면 그냥 기꺼이 나갈래요."


저 너머로 나가, 살아가고 싶어서.
한참 어지러이 흩어져있던, 필멸성을 띄는 욕망이 고갈되기 전에 겨우 한 문장으로 끄집어 내 보인다.

아, 그래요. 전 살고 싶었어요! 죽는게 답이라 하셨대도 저는 또 입 가볍게 굴며 아무도 못 들을 유언이나 구질구질 남겼겠죠, 결코 저 자신이 납득하지 못 했을 겁니다!
당신께서 또 희망을 잃게 되기 전에, 그리 반복되다 결국에 미숙한 내 마음까지 똑같이 고갈되기 전에! 이렇게 되기를, 나도 바라고 있었다고요. 이 편의주의적인 당신의 판단에 나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고, 마음에 걸린다 뿐이지 이 이상 없을 해피 엔딩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나는 이렇게 되고 싶었습니다! 솔직히 당신이 나가자고 할 때 나 좋아 죽을 뻔했다고! 정당하게 자유를 처음 쥔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나한테 가슴 뛰는지 아시냐고요?

 

줏대 없이 뱅글뱅글 돌기나 하는 나침판 하나 겨우 들고선 열망熱望을 외치는 인간이란 얼마나 멍청해 보이던가.

스스로가 그 꼴일 것을 생각하니 참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언제까지고 미스테리한 괴물로만 남고 싶었는데. 우스꽝스럽게 보일 지언정 까보니 아무것도 없는 인간인걸 보이고 싶지 않았다고.

정작 드러내고 나니, 상대는 작게 코웃음을 치고서는 조금 누그러든 태도로 바라볼 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며 지은 낯인지는 잘 모르겠다.


"천하의 괴물이 드디어 입을 떼었나."
"속 긁으니 이제 좀 시원하세요?"
"네가 나한테 한 게 있는데 이정도야."


제가 뭘 그렇게까지 했다고 이 꼴로 만드시냐니까? 이제보니 이 사람도 어지간히 성격이 나쁘네.
목을 두르며 묶은 연구원 가운을 풀어 헤쳤다. 대여섯 벌 정도로 덮어 가린 괴물의 꼴이, 정원 조명을 선명히 쬐어 내보여진다. 생기 없는 몸뚱이를 침식하듯 백색 비늘이며 껍질이 뒤덮고 있는 꼴은 과연 인간은 아니었다. 발목 밑을 덮은 비늘 때문에 걸을 때에 차박차박 가벼운 소리가 났고, 벌레와 새의 것이 기묘히 섞여 얽힌 날개는 여지껏 제대로 펴본 적도 없는지 떨리지도 않고 덕지덕지 접혀 날갯죽지에 불룩히 붙어있을 뿐이었다.

날 수 있냐 물었는데, 잘 모르겠네요. 아무것도 몰라요, 제가 뭘 할 수 있을지 하나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몰라요, 이젠 나도 몰라. 어떻게든 되겠죠 뭐! 아, 시원하다."


천천히 다시 걷기 시작한 상대를 앞서 뛰쳐나간다. 굳건히 잠겨있던... 언제나 열어 제낄 수는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던 출입문을 잡고 문고리를 비튼다. 우드득 하는 파열음과 함께 문의 걸림쇠가 떨어져 나간다.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과연 이 지겨운 연구실보다 나은 곳일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이런 뻔한 필멸성의 열망대로 살아가기 위해 이만큼씩 고민하고 함께 들여다보며 여지껏 걸어온 것이 아니던가!

뻔한 클리셰대로 괴물이 인간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을 지언정, 이것 또한 우리들이 만족하고 울고 웃으며 그려낸 또 하나의 이야기임을 긍정하기에.
더는 걸리는 것 없이 비집고 나선다. 더 없이 시원한 바람이 후욱 불어 들어오는 것 같았다. 하얀 나룻배를 부드럽게 밀어주는 북풍마냥, 찬탈해낸 생 대로 자유로이 떠나게 될 우리를 배웅하듯이.